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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가녀장의 시대 - 이슬아 작가

ldh-not-pear 2024. 11. 7. 14:40
가녀장의 시대
매일 한 편씩 이메일로 독자들에게 글을 보내는 〈일간 이슬아〉로 그 어떤 등단 절차나 시스템의 승인 없이도 독자와 직거래를 트며 우리 시대의 대표 에세이스트로 자리잡은 작가 이슬아, 그가 첫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제목은 ‘가녀장의 시대’. 〈일간 이슬아〉에서 이 소설이 연재되는 동안 이슬아 작가가 만든 ‘가녀장’이란 말은 SNS와 신문칼럼에 회자되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소설은 가부장도 가모장도 아닌 가녀장이 주인공인 이야기이다. 할아버지가 통치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여자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가정을 통치한다. 개천에서 용 나기도 어렵고 자수성가도 어려운 이 시대에 용케 글쓰기로 가세를 일으킨 딸이 집안의 경제권과 주권을 잡는다. 가부장의 집안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법한 아름답고 통쾌한 혁명이 이어지는가 하면, 가부장이 저질렀던 실수를 가녀장 또한 답습하기도 한다. 가녀장이 집안의 세력을 잡으면서 가족구성원1이 된 원래의 가부장은 스스로 권위를 내려놓음으로써 아름답고 재미있는 중년 남성으로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 가부장은 한 팔에는 대걸레를, 다른 한 팔에는 청소기를 문신으로 새기고, 집안 곳곳을 열심히 청소하면서 가녀장 딸과 아내를 보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가부장제를 혁파하자는 식의 선동이나 가부장제 풍자로만 가득한 이야기는 아니다. 가녀장은 끊임없이 반성하고, 자신을 키우고 생존하게 한 역대 가부장들과 그 치하에서 살았던 어머니, 그리고 글이 아니라 몸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노동에 대해 생각한다. 슬아는 그 어느 가부장보다도 합리적이고 훌륭한 가녀장이 되고 싶어하지만, 슬아의 어머니 복희에게도 가녀장의 시대가 가부장의 시대보다 더 나을까? 슬아의 가녀장 혁명은 과연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가세를 일으키려 주먹을 불끈 쥔 딸이 자신과 가족과 세계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분투하는 이슬아의 소설은 젊은 여성들이 각계각층에서 활약하며 과거에는 상상도 못한 혁신과 서사를 만들어내는 요즘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소설 속에서 이슬아는 당당하게 선언한다. “그들의 집에는 가부장도 없고 가모장도 없다. 바야흐로 가녀장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저자
이슬아
출판
이야기장수
출판일
2022.10.07


책갈피

15p.
가녀장의 지령이다. 웅이가 망치를 들고 오더니 벽에 쾅쾅 못질을 한다. 슬아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그것을 지켜본다.

17p.
쉰다섯 살의 웅이는 부친이자 피고용인이다. 작년까지는 일용직으로 일하다가 올해부터 비정규직 사원이 되었따.

18p.
복희는 슬아의 모친이자 피고용이다. 웅이와 달리 그는 슬아의 출판사에서 정규직으로 일한다.

19p.
“대표님, 수고하셨습니다.”
그러고선 자기들끼리 중얼거린다.
“역시 성공한 애는 달라.”

20p.
그들의 집에는 가부장도 없고 가모장도 없다. 바야흐로 가녀장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33p.
집안은 슬아 중심의 가녀장 체재로 재배치되었다. 오늘날 복희와 웅이는 슬아 밑에서 일한다. 출판사 업무뿐 아니라 집안일도 부부의 몫이다. 웅이가 주로 청소와 빨래를 하고 복희가 부엌일을 책임진다. 복희의 월급은 웅이 월급의 두배다.
“엄마의 노동이 아빠의 노동보다 대체 불가하기 때문이야.”
가녀장이 말했다. 이에 관해 웅이는 어떠한 불만도 없다.

68p.
그는 틀려도 개의치 않는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딸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에게 너그럽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세상과 타인에 관해서도 너그럽기 마련이다. 친절하게 정정해주면 그는 기뻐한다.

86p.
얼마나 억울하것어. 그만큼 공부를 했는디 입학금을 못 넣어서 학교에 못 들어가는 게 얼마나 분하고 슬프겄어. 다 무효가 되었으니 복희는 복희대로 다락에서 울고 나는 나대로 부엌에서 울었지.

172p.
막상 저렇게 열심히 할 거면서 왜 안 오려고 한 거냐…… 그러다가 깨닫는다. 열심히 할 걸 알아서 안 오려고 한 거구나.

180p.
다만 자신의 수고가 바람처럼 날아가는 것 같다. 준비한 시간에 비해 식사는 언제나 휘리릭 끝나버리고 만다. 하루이틀만 지나도 오늘 차린 밥상 같은 건 슬아나 웅이나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복희 자신조차도 잊을 게 분명하다.

210p.
친근함과 만만함은 깻잎 한 장 차이일 수도 있어.

244p.
무엇이 아름다운 건지는 우리가 직접 정할 수 있어. 너는 너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발견하게 될 거야.
245p.
월요일은 또 돌아올 것이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세계의 아름다움 역시 달라질 것이다.



독립출판사를 꾸린 슬아가 어머니인 복희와 아버지인 웅이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소소한 일상에 녹아있는 가부장시대의 폐해와 현 시점 여성과 소수자들이 맞닥드리는 어려움(이라고 쓰고 짜증남이라 읽는다)이 살며시 녹아있다.

왜 나는 엄마 이야기가 나오면 그렇게 감정이 북받쳐오르는지,
가녀장시대에서도 가장 나에게 큰 울림을 준 에피소드는 복희의 집안일 에피소드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읽으며 티타의 감정에 공감하는 복희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는데 자꾸만 나는 눈물이 났다.

줏대있는 삶을 사는 슬아가 부럽다.
아니다 줏대있게 살면서 성공한 슬아가 부럽다.
나도 성공해서 엄마를 고용해서 평생 해온 집안일에 댓가를 부여해주고싶다.
문득 소설속 주인공에게 부러움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