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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최진영

ldh-not-pear 2024. 11. 14. 00:38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9p.
기분이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게 편하다. 사람들에게 좀 더 못돼질 수 있으니까.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면 못되게 굴어야한다. 착하면 피곤하다. 사람들은 착한 사람을 우습게 보고 제 뜻대로 이용하려 드니까. 게다가 착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괴로워하고 미안해한다.

10p.
계속 맞을 생각을 하니 정말이지 만사가 지긋지긋했다. 나는 너무 지겨워서 씨발새끼 나가 죽어!라고 욕했다. 가짜아빠는 내 욕을 듣고 퉁퉁 불은 라면이 담긴 냄비를 내게 집어 던졌다. 나는 바닥에 나뒹구는 라면 가닥을 밟고 집을 나왔다. 냄비를 집어 던지는 대신 욕은 나쁜 거라고 가르쳐주며 나를 꼭 껴안아줄 진짜 아빠를 찾기 위해서.

21p.
알아듣게 말해, 멍청아. 나는 찬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솔직히 나도 다 알아듣는 찬수의 말을 마담이 못 알아듣겠다고 자꾸 야단을 치는 건, 마담이 찬수의 진짜 엄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찬수를 설득했다.

(생략)

그래 좋다. 그렇다 치자. 마담이 네 친엄마라고 치자 이거야. 하지만 친엄마라고 다 진짜엄마는 아니야.

45p.
모든 게 그런 식이었다. 백곰은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났고 똑똑한 줄 안다. 그리고 자기보다 돈 많고 힘센 사람이 하는 일은 뭐든 다 옳다고 했다. 왜냐면 자기가 그런 사람이랑 동급이라고 생각하지 때문에. 그러면서 자기가 그렇게 무시하는 언니가 사다 주는 옷은 왜 입고 밥은 왜 먹나 몰라, 없어 보이게.

70p.
잠자코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숨도 쉬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110p.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세상에 진짜란 게 하나도 없다면, 그러니까 온통 가짜뿐이라면 어쩌지? 그럼 세상에 진짜는 오직 나뿐인가? 정말 그럴 수도 있을까? 나는 진짜가 맞나?

113p.
나는 할머니에게 화만 내고 싶은데, 그것마저 못 하게 하니까 할머니는 진짜 나쁘다.

189p.
슬픈 눈으로 나를 자꾸 챙기려 드는 달수 삼촌까지 모두 다. 다들 뭔가를 예감하고 있으면서 그 예감이 사실로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는 것 같아서.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불행에 대한 예감은 실현되고야 만다. 사람들이 불안해하면서 불행을 자꾸 떠올리면 불행이 옳거니, 여기가 내 자리구나 하면서 냉큼 달려드니까.

223p.
걱정 마. 나는 아무에게도 붙잡히지 않아. 아무도 나를 붙잡지 않아. 왜냐면,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으니까.

248p.
나리에게서는 언제나 파괴 본능이 느껴졌는데 나는 그게 무섭다기보다 좀 슬펐다.

253p.
이유 같은 건 없다. 있었지만, 잊었다.
 


 

사실 나는 이런 어둡고 딥한 이야기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가끔 읽고 나서 또 가슴에 박히는 이야기를 보면 그 또한 사회의 부조리함을 명징하게 직조해낸 소설들임을 보면 참 나도 내 마음을 알 수 없다.

최진영 작가의 특징이라면, 너무나도 현실을 잘 고증해놔서 보는 사람이 불쾌하게 하는 것 아닐까.

그런 부분이 강한 호불호를 야기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읽게 되는 게 최진영 작가의 문체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 내내 가슴에 꽝. 돌은 얹어놓은 것과 같은 무거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소설로 적나라하게 사회를 고발하는 소설, 그걸 너무나도 잘 하는 작가 중 한 명이 아닐까.

소설은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소녀의 가정 서술로 시작한다.

자꾸만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빠와, 딸을 두고 반복적으로 가출을 일삼는 엄마 사이에서, 아이는 그들이 진짜 엄마 아빠가 아닐 것이라 생각하며 집을 나온다.

처음은 황금 다방의 사람들이다.

그중 진짜 엄마의 후보로 선정된 건 장미 언니다.

황금 다방에서 일하는 예쁜 얼굴을 가진 장미 언니는, 백곰이라고 서술되는 학벌만 좋은 거지 같은 새끼 놈이다.

백곰과의 만남에 함께하던 아이는 장미 언니가 본인을 동정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황금 다방을 떠나게 된다.

두 번째로 마주한 진짜 엄마의 후보는 기차역에서 만난 할머니로, 아이에게 간난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말을 하게 되면 버려질 것이라 생각한 아이는 벙어리인 척을 하며,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아간다.

할머니는 간난이를 본인의 손녀인 것처럼 거두어 키우지만, 갑자기 등장한 아들의 가족으로 인해 이 생활 또한 금방 종료된다.

그다음으로 교회 청년, 폐가의 남자, 각설이패, 가출 소녀들을 차례대로 만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만난 남자들 하나하나가 정말 쓰레기 그 자체이다. 이렇게 소설로도 사람에 대한 혐오가 생기다니. 정말 어떤 면에서는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아 그렇다고 여자들이라고 다 멀쩡했던 것도 아니긴 하다. 다만, 성적으로 건드리지 않았을 뿐.

 
 
 

참담함의 절정은 가출 소녀들의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나리, 유미, 그리고 그 소녀까지 한 명 한 명의 삶이 다 처참하다.

그중 나리는 새아빠에게 성적 학대를 받는 아이인데, 새아빠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 가출했으며 돈이 필요할 때만 집으로 들어간다.

엄마도 최악이다. 그저 나리라는 존재를 조용히 지워버리고 싶어 하며, 끝내 나리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골치 아파하며 그저 사건을 빠르게 덮고 싶어 한다.

나리가 성폭행에 저항하다 죽게 되는 모습을 목격했으나 자살로 사건이 종결되자 소녀는 나리의 새아빠를 죽이겠다 결심한다.

사흘 밤낮을 아파트 앞에서 잠복하고, 마침내 나리의 새아빠를 만난 소녀는 그를 칼로 찌른다.

하지만, 성인 남자를 어린 여자애가 어떻게 힘으로 이길 수 있을까.

소녀 역시 본인이 들고 있던 칼에 복부를 찔리게 된다.

이렇게까지 불행하고 암담하기만 한 내용의 글을 쓰게 된 이유가 뭘까.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

소녀가 진짜인 척하는 가짜를 수집하듯, 나는 당연한 척하는 부조리를 모으는 중이다. 이러다 더 멍청해질 수도 있다.

-최진영-


총평: 오늘도 사람이 싫다!

 

-끗-